홀로 된 자리에서 너를 만남
일시적 반신마비를 동반한 사고로 인해, 아주 오랫동안 사라지지 않는 만성 통증을 겪고 있다.
반신마비가 찾아와서 고생하고 약 먹고 통증을 견디며 일상생활을 하는 사람의 모습은, 흡사 절벽에 떨어져 절뚝 거리며 사망의 골짜기를 지나는 것과 같다. 항우울제와 소염 진통제를 친구 삼아 폭풍처럼 퍼 붓는 통증의 매질을 견뎠다.
20대 막바지에 사고가 났고 지금은 사고 후 햇수로 6년 된 거 같은데, 5년 차 후반에서 겨우 항우울제, 진통제를 복용하지 않고도 일상 생활을 할 수 있을 정도가 된 지금 이 순간이 참 소중하다.
건강 절벽에 떨어진다는 건, 누군가는 40대 중반에서 50대 초에 찾아올 질병들을 20대 후반과 30대 초에도 만나게 된다는 말이다. 퇴행성 질환이 일찍 찾아오기도 하고, 마치 80대 할아버지와 같이 날씨에 따라 몸이 아프고 끙끙 앓기도 했다.
절벽에 떨어지면, 몇 번은 친구들과 가족이 찾아오지만, 올라오지 못하면 혼자서 절벽 바닥의 차가움을 감내해야 한다. 처음엔 소리라도 지르면서 반항해보지만, 이내 좌절과 체념으로 빠져든다.
돌이켜 보면, 추운 절벽에서 발견한 사람들의 온기 덕에 절벽의 돌 하나라도 붙잡고 기어 올라올 수 있었던 거 같다. 기어 올라왔다는 표현도 지나칠 정도이고, 실제로는 그들이 바닥이 되어주고 그 바닥이 날 밀어 올려주었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이다.
가장 먼저는, 내가 얼마나 따뜻한 사람인 지 알았다. 그리고 이제 사람들이 얼마나 따뜻한 지 알게 된다.
모두가 출근한 그 시간, 나 혼자 침대를 흠뻑 적시며 통증을 견디는 그 때가 수도 없이 날 구타하고 지나가면 엉엉 눈물을 흘렸다. 아픔이 지나간 뒤에 무서움과 안도감이 몰려와 울고, 아무도 없다는 사실, 영원히 나 혼자일 것만 같아서 또 울었다.
그 때는 아무도 없는 줄 알았다. 그리고 아무도 없지만 무엇인가는 늘 거기에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먼저, 내 몸, 내 생명이 거기에서 날 살리고 있었다. 몸이 견디지 못하는 슬픔과 좌절을 만나면 몸을 크게 떨며 눈물을 흘려 위로해 주었고 큰 고통을 만날 때면 열을 내고 땀을 흠뻑 내어 주면서 고통이 끝내 날 죽이지 못하게 삶을 바쳤다.
다음은 외로움, 영원히 누군가와 만날 수 없다는 것을 결국 받아들이게 된 후, 눈을 감으면 그 외로움이 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죽어도 인간은 타인을 만날 수 없다. 태어나도 죽어도 혼자일 뿐이다. 영원히 신에게 버려져 있음을, 아니, 이제는 신이라는 단어를 빼고 버려져있음을 그저 느꼈다.
다음은 타자, 예전에는 타자에게 침범하거나 타자가 내게 침범하도록 했다. 그것을 관계 맺음인 줄 알았고 그렇게 해서 외로움을 제거해야 하는 것인 줄 알았다. 하지만, 외로움이 이유없이 거기에 존재함을 수용한 순간, 타자가 거기 이유없이 존재한다는 사실도 수용되었다. 정, 도덕, 법, 그런 것이 있어서 사람이 존재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는 것에 닿은 뒤에 삶이라는 물속에 푹 잠겨 죽을 수 있게 됐다.
마지막은 죽음이다. 죽음이 두려웠다. 아니, 죽음은 지금도 두렵다. 누군가와 깊은 관계 맺음에 빠져죽을 까 두렵고, 내가 나와 깊은 관계를 맺으면 그 또한 죽을 까 두려웠다. 삶이 피상적이고 깊이가 없었다. 두렵기에 도망하고 언제든 끊을 준비를 하며 살아왔던 것이다. 역할 놀이, 논리적 명분, 사는 이유, 관계를 해석하는 모델, 그것들이 죽을 까 두려워 한 번도 제대로 살지 못하게 했었다. 죽음은 이미 수용되었다. 그것으로 드디어 삶을 한 모금 한 마음 살게 되었다. 삶도 죽음도 언제나 거기 있다.
고통이 있었기에 지금이 있다! 이런 식으로 고통과 지금을 논리적으로 연결하려는 게 아니다. 이런식으로 사람들에게 고통스런 수행을 해야 한다고 강제하는 자기 계발서와 수많은 종교 수행(체험) 지침서가 있는 거 알지만, 그저 이미 수용되어있다는 것만 말하고 싶다.
내가 너를 생각하려면, 내 마음에 너를 담아 살게 해야 하고, 너를 끊임없이생각하는 데 에너지를 써야하듯, 우주도 우릴 그렇게 대하고 있다. 우리는 이미 수용되었다. 버려짐과 외로움 그리고 부재를 마음에 담았더니 그제서야 세상도 그렇게 날 마음에 품은 것을 알게 됐다.
여기서 안다는 것은 지식을 아는 것과 경험으로 느껴 아는 것을 동시에 이르는 말이다. 품는다. 안는다. 느낀다.
가장 핵심만 추출한다면, 죽음은 모르는 것과 연관되어있다. 모른다는 것을 느껴 안 뒤부터, 살아지게 되는 거 같다. 그 때 그 때 죽고 그만큼 모르면, 그만큼 알게되고 그만큼 살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끊임없이 너다. 끊임없이 혼자임을 만나고 끊임없이 거기에 너도 있구나 발견한다. 한 번도 사는 방법에 대해 알아본 적도 없으면서 그저 재주껏 잘 사는 우리의 모습이 그거 늘 거기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