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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야기를 꺼내며 맞장구 치는 게 공감하는 대화법인가? 본문
사회학자 찰스 더버는 대화에 자기 자신을 집어넣으려는 성향을 ‘대화의 나르시시즘’이라고 설명한다. 대화를 장악하고, 주로 혼자 떠들고, 대화의 초점을 자기 자신에게 맞추려는 욕구이다. 미묘하고 무의식적인 경우가 많다. 더버는 대화의 나르시시즘에 대해 “주목받고 싶어하는 지배적 심리가 잘 드러난 것”이라고 한다." - 슬픔에 빠진 친구를 위로하려는 우리가 흔히 저지르는 실수
내 몫의 것을 확실히 점유하며 내 이야기를 하는 대화
허핑턴 포스트에 한 글이 올라왔다. 대화에 익숙하지 않은 내가 책을 보고 가장 '안전'한 대화법이라 믿고 익힌 "맞창구 치며 상대가 한 이야기와 같은 주제를, 내 경험으로 되돌려 주기"였다. 글에서 언급된 학자가 붙인 이름은 바꾸는 반응
이다.
바꾸는 반응
너: 아 오늘 내 윗사람이 또 XX 해서 기분이 X같아.
나: 어, 나도 나도. 오늘 XX 가 전처럼 또 X 했지 뭐야?
이 대화법이 좋았던 첫째 이유는, 상대방이 정말로 무슨 생각과 감정을 가졌는지 알지 못해도 대화가 잘 된다는 점이다. 처음본 사람과도 마치 천지창조 때부터 친구였던 것 처럼 이야기를 할 수 있다.
두번째 좋았던 점은, 내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다. 어디서 해당 주제에 대해서 들었던 내용을 마치 내 이야기처럼 되돌려주면 상대와 대화를 이어나갈 수 있다.
이런 대화가 그저 사람들 사이에서 대화하는 '척'은 하게 해주었지만 아무리 많은 사람과 쉴 새 없이 떠들어도 대화가 끝난 후 그저 에너지를 소모했을 뿐이고 대화 상대방과의 관계는 여전히 피상적이라는 느낌만 남았다.
내가 전혀 다가가지 않고, 알려하지 않고 '나 대화 잘해요'를 어필하며 '대화를 누구와도 잘하는 나'라는 정체성 획득만 노렸기 때문이었다.
내 몫을 점유하지만, 그것을 상대방과 함께 하는데 사용하는 대화
바꾸는 반응과 반대로 제시된 개념이 돕는 반응
이다.
돕는 반응
너: X 가 오늘 또 XX 하더라 정말 나를 우습게 보는 거같아.
나: X 가 XX 할 때 어땠는데?
이런 대화는 초점이 같은 '주제'가 아닌 같은 '느낌'이고 그 느낌에 대해 그가 이야기를 하면서 스스로 더 깊이 알아갈 수 있도록 한다.
이런 대화를 하려면, 내가 조금이라도 상대방이 느낀 그 느낌을 느끼고, 그것에 대해 궁금해야한다.
나도 궁금하고 상대방도 궁금하고, 그 느낌에 관해 이야기 하면, 서로가 서로의 대화 시간을 확실히 점유하면서도 서로를 향해 사용하게 된다.
그러나 대화는 대화다.
어떤 완벽한 대화 스킬이나 방법은 없다. 허핑턴 포스트 글에서 '실수'라고 규정한 사례가 전혀 실수가 아닐 수도 있단 거다.
쉴새없이 상대방이 말하는 것을 통해 자신은 말을 안하고 쉬는 것을 기대하며 대화하는 사람도 있고, 상대방과 각자 자신의 이야기를 하면서 정보와 정서를 교환하는 사람도 있기 때문이다.
누구라도 내 말을 들어줬으면 할 때는, 사실 미리 말을 하는게 가장 정중하고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대화 도입부터 부탁
너: 00야 오늘 내가 너무 괴로워서 그러는데, 혹시 네 마음과 에너지가 허락한다면, 내가 하는 이야기만 들어줄 시간을 줄 수 있겠니?
나: 아 그래? 무슨 일이야?
대화 중반에 부탁
너 : 나는 어쩌구 저쩌구.. 이러고..
나: 00야 오늘 내가 너무 괴로워서 네가 하는 말들이 맘에 와닿지 않고 그냥 화만 나. 너는 날 모르는 것만 같아. 나는 지금 내 느낌을 가장 친한 친구인 네가 모두 알아주었으면 해. 네가 괜찮다면 지금부터 내 이야기만 하고 너가 들어줄 수 있겠니?
내가 고통스러운 경우에 처했다고 해서, 상대의 시간을 마음대로 빼앗고 점유하라는 법이 없다. 모든 대화가 나를 도우는 대화여야 한다는 법도 없다.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건 대화 상대에게 작은 선의를 요청하고 그들이 기꺼이 자신의 마음을 다해 자신의 귀와 마음을 열어준다면, 그 기회를 누리는 것 뿐이다.
상대방이 가지지 못한 마음의 품과 대화 스킬을 내가 슬픔에 빠졌다고 만들어 낼 수는 없다. 그저 그 때 내가 필요한 것을 기꺼이 줄 수있는 사람을 찾아 우리의 필요를 채우고, 그 필요를 채우지 못했다면 나라도 내 이야기를 볼 수 있도록 혼자만의 대화를 하면 된다.
'실수'라고 명명했지만, 실제론 '미안함과 후회라는 감정을 느겼고 더 잘하고 싶었은 마음'이라고 표현했다면 더 좋았을 거 같다.
친구의 아픈 마음을 지금에서야 알고는 더 따뜻하게 해주고 싶다는 마음을 사는 대신, 아 저사람 저렇게 대화를 하네, 저건 틀렸어! 라며 옛날에 자신의 모습을 비난하는 자기 혐오 패턴으로 가버리기 쉬울 거 같기 때문이다.
미안함, 후회, 무거운 책임감을 '실수'나 '죄'로 분류할 필요는 없었다. 그것이 얼마나 따뜻한지 까지 닿지 못한 상태에서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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